CHRONICLE
로마와의 대립
기원전 2세기 말의 킴브리부터 서기 476년까지입니다. 각 카드는 왜, 누구, 결과만 먼저 보여 줍니다. 토이토부르크는 그중 가장 길게 적었습니다. 476년 뒤의 왕국은 다음 메뉴입니다.
01 · Cimbri and Teutones
킴브리·튜톤 전쟁과 마리우스
기원전 113–101년
킴브리와 튜톤이 남하해 로마군을 잇따라 깨뜨린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기원전 102년과 101년 두 전투로 막은 전쟁입니다. 로마가 라인 북쪽의 이동을 처음 크게 두려워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 왜
- 이탈리아로 내려오는 큰 무리를 집정관 군대가 막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105년 아라우시오의 패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 누구
- 킴브리, 튜톤, 암브로네스와 로마의 마리우스·카툴루스. 이들의 언어가 게르만어였는지는 불확실합니다.
- 결과
- 튜톤은 아쿠아이 섹스티아이(102), 킴브리는 베르켈라이(101)에서 무너졌습니다. 마리우스는 로마의 구원자로 기억됩니다.
02 · Caesar and Ariovistus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
기원전 58년
갈리아 전쟁에 개입한 카이사르가, 라인 강 서쪽으로 들어와 세콰니와 하이두이 사이의 분쟁에 끼어 있던 수에비의 왕 아리오비스투스를 알자스 쪽 전투에서 몰아낸 해입니다.
- 왜
- 갈리아 부족의 일부가 게르만족을 용병과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그 세력이 커지자 다른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호소했다고 카이사르가 적습니다.
- 누구
-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 주된 기록은 카이사르 자신의 『갈리아 전기』 1권입니다.
- 결과
-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 동쪽으로 물러났습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가 갈리아와 다르다는 경계를 자기 전쟁의 명분으로 씁니다.
03 · Augustan campaigns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원정
기원전 16–서기 6년 무렵
아우구스투스는 라인에서 엘베까지를 로마의 영향 아래 두려고 의붓아들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를 보냈습니다. 서기 9년 직전에 게르마니아는 거의 속주가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왜
- 기원전 16년 로올리우스의 패배(클라데스 롤리아나)로 군단 독수리 하나를 잃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라인 너머를 그냥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 누구
- 드루수스(기원전 12–9년), 그 뒤 티베리우스. 총독으로 뒤에 바루스가 부임합니다.
- 결과
- 드루수스는 엘베까지 닿았으나 기원전 9년 낙마로 죽었습니다. 영구 속주로 만드는 일은 서기 9년에 멈춥니다.
04 · Teutoburg Forest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서기 9년
케루스키의 아르미니우스가, 로마 기사 신분으로 총독 바루스의 신뢰를 받던 자리에서 돌아서 제17·18·19군단을 숲과 습지의 행군 중에 무너뜨린 전투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엘베 국경은 여기서 멈춥니다.
- 왜
- 바루스는 게르마니아를 이미 굴복한 속주처럼 다루며 세금과 재판을 밀었고, 아르미니우스는 그 불만과 로마 진법의 지식을 동맹으로 묶었습니다.
- 누구
- 아르미니우스가 이끈 케루스키 등 여러 부족과,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의 군단 셋과 보조병.
- 결과
- 바루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세 군단 번호는 다시 쓰이지 않았습니다. 실질 국경은 라인 강으로 돌아갔습니다.
05 · Germanicus
게르마니쿠스의 보복과 독수리
서기 14–17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라인 군단이 흔들리자, 게르마니쿠스가 군단을 수습하고 서기 14–16년 게르마니아를 여러 번 쳤습니다. 바루스의 독수리 중 둘을 되찾았지만, 엘베까지의 속주는 되살리지 못했습니다.
- 왜
- 서기 9년의 치욕과, 아우구스투스 사후 군단의 봉급 반란을 함께 눌러야 했습니다.
- 누구
- 게르마니쿠스와 아르미니우스. 티베리우스는 전쟁을 길게 밀지 않고 게르마니쿠스를 불러들입니다.
- 결과
- 서기 16년 이디스타비소 등에서 로마가 이겼습니다. 17년 게르마니쿠스는 개선합니다. 국경은 라인에 남습니다.
06 · The limes
리메스, 강의 국경
서기 1–3세기
리메스는 성벽만이 아니라 강, 길, 탑, 보루로 이뤄진 국경 시설입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라인 강이 기본선이 되었고, 상게르마니아와 라에티아에서는 강을 벗어나 내륙으로 나무와 돌의 장벽이 이어졌습니다.
- 왜
- 엘베까지 밀고 들어가는 정복이 실패한 뒤, 로마는 지킬 수 있는 선을 시설로 만들었습니다.
- 누구
- 라인 군단(상·하게르마니아)과 국경 밖 부족. 도미티아누스 이후 선이 정리되고, 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시대에 시설이 단단해집니다.
- 결과
- 2세기에는 비교적 안정된 국경이었습니다. 3세기 중반 알라만니의 압력으로 라인-다뉴브 사이 돌출부(아그리 데쿠마테스)는 버려집니다.
07 · Batavian revolt
바타비 반란
서기 69–70년
네 황제가 서로 죽인 해, 바타비 보조군의 지휘관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라인 하구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부 갈리아 귀족이 손을 잡았고, 로마는 베스파시아누스 쪽에서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를 보내 진압합니다.
- 왜
- 황제가 비는 해의 권력 공백, 보조군에 대한 징집과 불신, 키빌리스 개인의 로마 내전 경력이 겹칩니다.
- 누구
- 키빌리스와 바타비·이웃 부족, 갈리아의 클라시쿠스 등, 그리고 케리알리스의 로마군.
- 결과
-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바타비는 없어지지 않고 다시 보조군 공급지로 남습니다. 타키투스의 서술은 강화 직전에 끊깁니다.
08 · Marcomannic Wars
마르코만니 전쟁
서기 166–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마르코만니·콰디를 비롯한 다뉴브 북쪽 무리들이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북부까지 위협한 긴 전쟁입니다. 황제는 전선에서 병사했습니다.
- 왜
- 국경 밖의 압력과 이동, 그리고 역병으로 약해진 군단이 겹칩니다. 한 가지 원인으로 줄이지 않습니다.
- 누구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때 공동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그리고 마르코만니·콰디 등.
- 결과
- 로마는 간신히 선을 회복했습니다. 마르쿠스는 180년 빈도보나(빈) 또는 시르미움 근처 전선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새 속주로 다뉴브 북쪽을 고정하지는 못했습니다.
09 · Third-century crisis
3세기의 위기
서기 235–284년 무렵
황제가 자주 바뀌고 국경이 동시에 뚫린 50년입니다. 라인에서는 알라만니와 프랑크가, 다뉴브와 흑해에서는 고트가 로마의 도시를 쳤습니다. 게르만 왕국들이 이 틈에 갑자기 완성된 것은 아니고, 이름의 무게가 커진 세기입니다.
- 왜
- 군단이 자기 사령관을 황제로 세우는 내전, 화폐와 역병, 국경 밖의 약탈이 한 세대를 겹쳐 짓눌렀습니다.
- 누구
- 알라만니, 프랑크, 고트와, 이들을 상대하다 죽은 황제들. 데키우스는 251년 아브리투스에서 고트와의 전투 중 죽었습니다.
- 결과
- 260년 무렵 라인-다뉴브 돌출부가 포기됩니다. 갈리아에는 분리된 제국이 잠시 섭니다.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다시 고정하기 시작합니다.
10 · Huns and migrations
훈족과 민족 대이동
서기 370년대–450년대
370년대 훈족이 흑해 북쪽의 고트를 밀어 다뉴브 국경이 열립니다. ‘민족 대이동’은 후대의 이름입니다. 한 민족이 통째로 이사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무리가 이동하고 정착하고 로마와 계약한 과정입니다.
- 왜
- 훈족의 압력이 계기였습니다. 훈족이 왜 서쪽으로 왔는지는 고대 기록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 누구
- 훈족은 게르만족이 아닙니다. 언어조차 확정되지 않은 초원 연맹입니다. 고트, 반달, 부르군트, 프랑크는 게르만어 쪽 이름입니다.
- 결과
- 376년 고트의 일부가 로마 영토로 들어왔고, 378년 아드리아노플로 이어집니다. 5세기 갈리아·히스파니아·아프리카에 게르만 왕국이 생깁니다.
11 · Adrianople
아드리아노플 전투
서기 378년 8월 9일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플에서 동로마 황제 발렌스가 고트·알란 기병과 보병에 져 전사한 전투입니다. 게르만족이 하나의 나라로서 로마를 이긴 전쟁이 아니라, 제국 안에 들어온 고트 집단과 황제 군대의 파국입니다.
- 왜
- 376년 훈족을 피해 넘어온 테르빙기 등을 로마가 제대로 정착시키지 못했고, 약탈과 반란이 전쟁이 되었습니다.
- 누구
- 발렌스와, 프리티게른 쪽 고트. 그레우퉁기 기병이 전투 중에 합류했다고 암미아누스가 적습니다.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지원은 제때 닿지 않았습니다.
- 결과
- 발렌스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2년 고트와 정착 계약을 맺습니다. 제국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2 · Sack of Rome, 410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
서기 410년 8월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로마 시를 점령하고 사흘간 약탈했습니다. 서로마가 그 해에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황제는 라벤나에 있었고, 제국의 서쪽 정부는 그 뒤로도 66년을 더 갑니다.
- 왜
- 알라리크는 정착지와 군량, 직위를 요구하며 이탈리아를 여러 번 협박했습니다. 408년 스틸리코가 처형되고 고트 병사들의 가족이 학살된 뒤 협상은 더 나빠졌습니다.
- 누구
- 알라리크의 서고트와, 호노리우스의 서로마 조정. 스틸리코는 반달계 아버지와 로마 경력을 가진 장군이지 게르만 왕이 아닙니다.
- 결과
- 도시는 약탈당했으나 불바다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알라리크는 같은 해 이탈리아 남부에서 죽었습니다. 서고트는 갈리아로 올라가 왕국을 만듭니다.
13 · Sack of Rome, 455
반달의 로마 약탈
서기 455년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알라니 함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했습니다. 410년보다 조직적으로 보물과 사람을 카르타고로 가져갔다고 전합니다. 도시가 지도에서 지워진 사건은 아닙니다.
- 왜
- 455년 3월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되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잠깐 황제가 된 공백을 가이세리크가 이용했습니다.
- 누구
- 가이세리크와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그리고 서로마의 짧은 황제 막시무스.
- 결과
- 황후 에우독시아와 딸들이 카르타고로 끌려갔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반달 왕국은 그 뒤로도 카르타고를 지키다 534년 동로마에 무너집니다.
14 · Catalaunian Plains
카탈라우눔 전투
서기 451년
샹파뉴의 들판에서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와 서고트 왕 테오도릭 1세 쪽 연합이 아틸라의 훈족 연맹과 맞선 전투입니다. 로마 대 게르만의 결전이 아닙니다. 양쪽에 게르만 무리가 있었습니다.
- 왜
- 아틸라가 갈리아로 들어왔습니다.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알라니 등과 연합해 길을 막았습니다.
- 누구
- 아이티우스, 서고트의 테오도릭 1세(이 전투에서 죽음), 아틸라. 훈족 쪽에도 동고트·게피드 등이 있었습니다.
- 결과
- 아틸라는 철수했습니다. 훈족이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452년 이탈리아를 치고, 아틸라는 453년 죽습니다. 전장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합니다.
15 · Odoacer and 476
오도아케르와 서로마
서기 476년
스키리 계열로 흔히 불리는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의 용병 반란을 이끌어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하고, 황제의 표장을 동로마의 제논에게 보냈습니다. 서로마의 끝으로 가장 자주 잡는 해입니다.
- 왜
- 이탈리아에 주둔한 게르만계 병사들이 땅과 처우를 요구했고, 오레스테스(로물루스의 아버지)가 거절했습니다.
- 누구
- 오도아케르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법적으로는 달마티아의 율리우스 네포스가 아직 서로마 황제로 인정되는 상태였습니다. 네포스는 480년에 죽습니다.
- 결과
-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의 왕을 칭하며 제논의 이름으로 통치했습니다. 493년 동고트의 테오도릭에게 죽습니다.